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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의 염색공방, 쪽빛이 사라지는 마을 경남 하동의 어느 조용한 마을, 바람이 스치는 골목 끝자락에 낡은 염색 공방이 하나 있습니다. 먼지 쌓인 천 위로는 햇살이 아스라이 내려앉고, 바닥에는 발로 밟아 짠 염색통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곳은 한때 ‘쪽빛 마을’로 불리던 하동의 대표적인 천연염색 공방이 자리하던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오직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천을 물들이는 ‘쪽 염색’이 이루어졌습니다. 바람에 나부끼는 푸른 천의 물결은 사람들의 마음마저 쪽빛으로 물들게 했습니다. 쪽은 우리나라 전통 염색 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식물입니다. 그 잎을 발효시키고 숙성시켜 물들이면 천은 어느새 은은한 푸른빛으로 변합니다. 화학염료가 보편화되기 전까지, 하동의 염색공방은 자연이 주는 색을 고스란히 옷감에 담아내는 예술의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 2025. 6. 8.
제주의 테우, 나무배의 마지막 항해 제주 바다는 단순한 풍경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주의 삶 그 자체였고, 역사였으며, 섬사람들의 숨결이었습니다. 바다와 함께 살아온 제주 사람들의 일상은 바람을 이겨내는 법, 파도에 순응하는 법, 그리고 자연과 공존하는 법을 몸으로 배워가며 만들어졌습니다. 그런 제주의 해안 마을들에 오래도록 함께해온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테우’입니다. 테우는 제주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사용돼 온 전통 나무배입니다. 크지 않은 체구에 투박한 외형을 가졌지만, 그 안에는 제주 어민들의 지혜와 생존의 기술이 녹아 있었습니다. 테우는 물질하러 나가는 해녀들의 짐을 실어 나르고, 연안 어로에 쓰였으며, 섬과 바다 사이의 생활을 연결하던 소박한 교통 수단이자 노동의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습니다. 엔진이 달린 어선이 .. 2025. 6. 7.
영주의 목화농사, 사라진 흰 들판 경북 영주는 한때 목화꽃이 하얗게 물결치던 고장이었습니다. 논두렁 옆 밭두렁까지, 가을이면 눈이 내린 듯 들판을 덮던 흰 꽃송이들. 사람들은 그것을 ‘솜꽃’이라 불렀고, 그 꽃은 겨울 이불이 되고, 아기 옷이 되며, 삶을 감싸는 온기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춘 이 목화의 풍경은, 사실 영주를 포함한 경북 내륙지방에선 20세기 중반까지도 매우 흔한 장면이었습니다. 논농사와 병행하던 목화재배는 가내 수공업과 연계되며, 섬유산업의 기초를 이루는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마을마다 목화 밭이 있었고, 해마다 수확기를 맞으면 여자아이부터 할머니까지 온 가족이 나와 솜을 땄습니다. 그리고 저녁이면 솜을 타는 소리, 물레 돌리는 소리가 마을을 채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디서도 목화밭을 보기 어렵습.. 2025. 6. 7.
고흥의 자염장, 소금보다 짠 기억 전남 고흥의 해안선을 따라 걷다 보면, 오래된 염전터와 낡은 소금창고들이 바닷바람에 씻기듯 무심히 서 있는 풍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는 한때 삶의 터전이었던 자염장이 숨 쉬고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췄지만, 이곳 고흥은 한 세기 전만 해도 자염 -즉, 바닷물을 가마에 끓여 소금을 만들던 자염법- 으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소금 생산지였습니다. 자염장은 단순히 소금을 만드는 공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다와 사람, 불과 노동이 빚어낸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가족 단위로 운영되던 자염장에는 하루 종일 불을 지피고, 소금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난 아이들이 있었고, 굵은 땀방울로 하루를 마무리하던 어른들의 손길이 녹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고흥의 자염장은 거의 모든 기능을 멈.. 2025. 6. 6.
포천의 화덕유기장, 불과 금속의 춤 경기도 포천의 외곽, 한적한 산자락 아래로 들어서면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오래된 한옥과 그 옆의 낮은 작업장, 그 안에서는 불꽃이 살아 숨 쉬고, 무쇠 냄비처럼 묵직한 망치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바로 '화덕유기장'이 이뤄지는 공간입니다. 1200도가 넘는 화덕 앞에서 장인은 금속을 다스리고, 붉은 불덩이를 손으로 다뤄가며 유기(鍮器)를 만듭니다. 이 전통은 단순한 공예가 아니라, 수백 년 간 한국의 식문화와 예술을 함께 해온 유산입니다. 포천은 조선 시대부터 유기의 주 생산지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화덕유기’는 거푸집이 아닌 망치와 불로 형태를 다듬는 전통 방식으로, 전국에서도 몇 남지 않은 장인들만이 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이제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수.. 2025. 6. 6.
단양의 황장목, 금지된 숲의 기록 충청북도 단양군. 이 고요한 산골짜기에 한때 조선 왕실의 숨결이 깃들었던 ‘황장목 숲’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황장목(黃腸木)이란 왕실 전용 목재로 쓰였던 최고급 소나무를 뜻하며, 그 품질은 곧 국가의 위신을 상징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산 전체를 ‘황장금표(黃腸禁標)’로 묶어, 일반인의 출입은 물론 벌채도 엄격히 금지됐습니다. 그만큼 귀했고, 위엄을 지녔으며, 조심스러웠던 숲이었습니다. 오늘날, 단양의 황장목 숲은 대부분 사라졌고, 그 일부는 국립공원 내 자연휴식림으로 지정되어 제한적으로만 접근이 가능합니다. 나무는 더 이상 자르지 않고, 그 자리에 남은 몇 그루만이 옛 영화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숲을 그냥 ‘산림 자원 보호지’로 생각하지.. 2025.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