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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발효젓갈, 갯벌에서 묻은 시간의 맛

by 조용한 성장 2025. 6. 11.

전라북도 고창은 단지 동학농민운동의 역사로만 기억되어서는 안 되는, 수천 년 갯벌과 인간의 교류가 켜켜이 쌓인 고장입니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이곳의 갯벌은 단순한 자연 생태계가 아니라, 수많은 세대가 삶의 방편으로 마주했던 노동의 터전이기도 했습니다.

 

고창의 바다를 따라 자리한 작은 어촌 마을들에서는 지금도 이른 새벽 갯벌을 누비는 할머니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발걸음은 단순한 조개나 낙지를 캐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온 발효젓갈의 재료를 채취하기 위한 여정이기도 합니다. 멸치, 새우, 황석어, 전어 같은 생선들은 소금과 갯벌의 흙, 그리고 그 지역의 공기와 햇살 속에서 서서히 삭고, 깊고도 구수한 젓갈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제는 대형마트에서도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젓갈이지만, 사실 이 전통 발효 방식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더 이상 갯벌에 나가 멸치를 손질하고, 장독에 수개월을 기다려야 할 이유가 없어진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젓갈은 이제 ‘산지 직송’이 아니라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가공식품이 되었고, 고창의 바닷바람과 손맛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히 옛날 방식을 회고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한 지방의 기후와 풍토, 노동과 시간이 켜켜이 담긴 식문화의 단절 앞에 서 있습니다. 고창의 발효젓갈은 단지 오래된 음식이 아니라, 그 지역의 삶과 기억을 품고 있는 문화유산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 발효의 이야기를 다시 불러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창의 발효젓갈, 갯벌에서 묻은 시간의 맛
고창의 발효젓갈, 갯벌에서 묻은 시간의 맛

갯벌에서 시작된 발효

고창의 젓갈 문화는 바다와 소금, 그리고 기다림이라는 세 요소의 만남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고창은 전통적으로 갯벌이 풍부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큰 지역으로, 해산물 채취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구시포, 하전, 심원 일대의 갯벌은 예로부터 생물 다양성과 함께 맛 좋은 새우젓과 멸치젓을 생산하는 곳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이곳의 새우젓은 ‘고창 하전 새우젓’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품질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6월 하순부터 8월 초 사이, 장마가 걷히고 햇빛이 내리쬘 때 채취한 새우는 수분 함량이 낮고 살이 단단하여 젓갈 담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합니다. 잡은 즉시 굵은 천일염에 절이고, 항아리에 담아 서서히 발효시키는 이 작업은 단순히 물리적 보존이 아니라, 맛을 극대화하는 ‘자연의 조리법’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적인 발효방식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기후나 온도에 따라 품질 편차가 발생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젓갈을 담그는 사람은 온도, 소금의 양, 해산물의 상태, 바람의 방향까지 민감하게 파악해야 했습니다. 장독대 하나를 놓고도 그늘이 드리워지는 위치는 피하고, 해가 가장 잘 드는 방향으로 배치하던 그 방식은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경험과 감각, 그리고 전승으로 이어진 삶의 지혜였습니다.

 

지금도 고창의 몇몇 어촌에서는 여전히 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젓갈을 만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70대 이상 고령자로, 젊은 세대가 그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힘이 드는 작업이기도 하거니와, 수익성도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갯벌에서 시작된 발효의 문화는 점차 기록되지 못한 채 사람과 함께 사라지고 있습니다.


항아리와 기다림

고창의 발효젓갈에서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를 꼽자면 단연 장독일 것입니다. 장독은 단순히 발효 용기를 넘어, 한국 전통음식의 철학을 담은 공간입니다. 고창에서는 항아리를 ‘장독대’ 위에 올려놓고 바람이 잘 통하고 햇빛이 골고루 드는 마당 한켠에 둡니다. 항아리는 숨을 쉬며 젓갈 안의 미생물들이 자연스럽게 발효하도록 돕습니다.

 

발효에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이 기다림은 단순히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보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날씨를 읽는 감각, 소금의 염도를 조절하는 숙련, 재료의 상태를 판단하는 경험이 함께 녹아 있습니다. 오늘 항아리 뚜껑을 열었을 때 냄새가 어땠는지, 빛깔이 어떤지, 점성이 너무 많거나 적지는 않은지 등을 확인하는 이 일련의 과정은 과학 실험과도 같습니다. 다만 실험자의 도구가 손끝이고, 관찰의 도구가 오감이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젓갈 항아리 앞에 서서 “올해는 덜 삭았네”, “작년만 못해”라고 말하는 노인의 얼굴에는 단순한 평가 이상의 감정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말 속에는 수십 년을 반복해 온 계절과 재료, 손끝의 판단이 담겨 있습니다. 이 기다림은 세대를 관통하는 전통이자,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속도와 시간의 감각’입니다.


마지막 젓갈집

고창의 젓갈 문화는 오래된 시장과 함께 존재해왔습니다. 고창읍성과 가까운 고창전통시장, 그리고 하전이나 심원리 같은 어촌마을의 재래시장에서는 한때 젓갈만을 파는 좌판이 길게 늘어서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할매 젓갈집’이라 불리던 가게는 단골이 줄을 섰고, 택배를 요청하는 외지 손님들로 북적였습니다.

 

그 집의 주인은 팔십이 넘은 할머니였는데, 새벽에 갯벌에서 새우를 잡아 소금에 절이고, 직접 항아리에 담아 발효시켜 팔았습니다. 탁 트인 마당 한복판에 장독 수십 개가 늘어서 있었고, 그 속에 담긴 젓갈은 마치 생명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했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이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몰라 불안하다고 했고, 자식들이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며 이 일에 관심이 없다는 것도 슬프게 말했습니다.

 

이제 그 집도 문을 닫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장독대는 비워져 있었고, 할머니는 요양원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할매 젓갈집’이라는 간판은 여전히 달려 있었지만, 그 아래로는 더 이상 고소한 냄새도, 손님들의 웃음도, 묵직한 기다림의 기운도 흐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하나의 가게가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음식 문화, 발효라는 느린 기술,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를 전제로 한 삶의 철학이 더 이상 재현되지 않는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발효라는 문화, 되살릴 수 있을까

고창의 발효젓갈은 단지 오래된 음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을 다루는 기술이며, 자연의 흐름을 관찰하고 조율하는 방식이며,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문화입니다. 우리가 지금 잃고 있는 것은 맛만이 아니라, 그 맛을 만들어낸 시간과 풍경, 관계들입니다.

 

지금 고창에서는 발효식품 박물관이나 지역 농가를 중심으로 젓갈 전통을 되살리려는 움직임도 일부 존재합니다. 학교에서 체험학습으로 장 담그기 수업을 열기도 하고, 젊은 창업자들이 발효음식의 가치에 주목해 새로운 상품을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전통 발효젓갈은 ‘향수’의 대상일 뿐, 일상으로 완전히 돌아오진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화를 어떻게 다시 되살릴 수 있을까요? 그 출발은 ‘기록’과 ‘공감’입니다. 지금 젓갈을 담그는 이들의 손끝을 기록하고,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맛을 단지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과 연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발효는 시간이 만든 예술이자, 기술을 뛰어넘는 관계의 예입니다.

 

어느 날, 고창의 갯벌에 다시 새우 잡는 어른들의 발걸음 소리가 퍼지고, 항아리 뚜껑을 여는 아이의 손이 닿으며, 젓갈을 먹는 젊은 세대가 “이 맛이 뭐지?”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날이야말로 발효라는 문화가 다시 살아나는 순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