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오랫동안 활의 민족이라 불려왔습니다. 궁술이 단순한 무기 기술을 넘어 정신 수양이자 민속문화로 자리 잡았던 나라이며, ‘활 잘 쏘는 사람’은 신뢰와 덕망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조선 시대 무과시험에서도 가장 중요한 항목이 활쏘기였고, 병영이나 향교 주변에는 활터가 있어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 노인들까지 일상 속에서 활을 익히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활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활을 쏠 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현대식 양궁과는 전혀 다른 전통 궁술, 그보다 더 섬세하고 복잡한 ‘전통 활 만들기’는 더욱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특히 봉화, 안동, 영양 등 경북 북부 지역에서 이어져오던 복합궁 제작 기술은 과거 전국 장인들이 찾던 명소였지만, 지금은 단 한두 사람만이 그 기술을 겨우 붙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글은 봉화에서 전통 활을 만드는 마지막 장인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무, 뿔, 힘줄, 생풀과 같은 생명의 재료들이 사람의 손에서 어떻게 하나의 활로 완성되는지, 그 오랜 시간과 집중, 그리고 기술의 아름다움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사라져가는 손기술이자 무형의 기억을 우리가 지금 기록하지 않는다면, ‘활의 나라’라는 말도 머지않아 교과서 속 표현으로만 남게 될지 모릅니다.
나무와 뿔, 활의 재료는 살아 있다
전통 활을 만드는 일은 단순히 ‘무언가를 깎고 붙이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재료들과 소통하며, 변화무쌍한 성질을 이해하고 조율해내는 오랜 수공의 예술입니다. 봉화의 활장(활 만드는 장인) 이춘복 장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활은 나무와 뿔, 힘줄이 서로 말이 통해야 움직입니다. 서로 싸우면 그 활은 부러지고 맙니다.”
봉화 지역에서 제작되는 전통 활은 주로 ‘복합궁’이라 불리는 구조로, 여러 재료를 겹겹이 결합시켜 탄성과 내구성을 극대화한 궁입니다. 이 궁의 중심은 참나무와 단풍나무 같은 단단하면서도 휘어짐이 좋은 목재입니다. 이 목재는 보통 1년 이상 자연건조시키며, 습기와 온도 변화에 따른 특성을 미리 파악해야 합니다.
그 위에 물소의 뿔을 가공해 양옆에 붙입니다. 뿔은 나무보다 훨씬 단단하고 탄성이 뛰어나 활의 반발력을 높이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뿔은 쉽게 뒤틀리고 잘 붙지 않기 때문에 섬세한 온도 조절과 접착 기술이 필수입니다. 활장은 뿔을 불에 지지고, 물에 담그며 모양을 다듬고, 아교를 발라 수차례 겹쳐 붙입니다. 이때 쓰이는 아교는 한우의 힘줄과 가죽을 오랜 시간 고아서 만든 전통 접착제입니다.
활의 등쪽에는 힘줄을 붙입니다. 이는 대개 소나 사슴의 힘줄을 고운 실처럼 다듬어 여러 겹으로 덧대는 방식인데, 활의 유연성을 높이고 튕김을 조절하는 결정적인 공정입니다. 힘줄은 매우 예민한 재료로, 습도와 온도에 따라 길이가 달라지고 수축하며, 붙이는 방식에 따라 활 전체의 성능이 달라집니다.
봉화 지역은 여름과 겨울의 온도차가 크고 습도가 적절해 이런 전통 궁 제작에 적합한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로부터 수많은 활장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기술을 연마해왔습니다. 하지만 재료의 수급 자체가 점점 어려워지고, 손으로 모든 공정을 수행해야 하는 이 기술은 이제 몇몇 노장인들 외에는 전승자가 없는 실정입니다.
활장이라는 이름, 살아 있는 기억의 직업
활장을 단순히 ‘공예가’로 부르는 건 어쩌면 무례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제작자이자 사냥꾼이었고, 병법을 알던 기술자였으며, 지역 공동체의 조력자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관청에서 활장을 직접 관리하거나 우대하기도 했고, 사대부 가문에서는 가족이나 제자들에게 활 만들기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봉화에서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10여 곳의 활 공방이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대구, 서울, 심지어 일본에서까지 주문을 받을 만큼 명성을 얻었으며, 각 지역의 활터에서 봉화제 활은 ‘가장 쏘기 좋은 활’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반월형 곡선’을 이루는 봉화궁은 장력이 뛰어나고 반동이 적어, 국궁 고수들 사이에서 필수 아이템처럼 여겨졌습니다.
이춘복 장인은 10대 시절 아버지의 공방에서 나무를 깎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손에 물집이 잡히고 뿔이 말리는 냄새에 멀미를 할 정도였지만, 활이 한 자루 완성될 때마다 그 성취감에 사로잡혀 결국 평생 이 일을 놓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한 자루 활을 만들기까지 짧게는 석 달, 길게는 여섯 달도 걸립니다. 그냥 자재를 이어 붙이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대화하며 맞추는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활장이란 단어에는 단순한 직업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이 가장 정교하게 대화하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기술자의 정체성이며,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무형의 기억이자 전승의 통로입니다.
지금, 활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늘날 봉화의 전통 활 제작은 거의 중단되다시피 한 상태입니다. 활의 수요가 줄어든 것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후계자가 없다는 점입니다. 활 제작은 돈이 되는 기술이 아니고, 온종일 불 앞에서 땀 흘려야 하며, 몇 달씩 한 자루에 매달려야 하는 일입니다. 젊은 세대가 이 일을 배우려 하지 않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통 활 제작에는 환경과 제도적인 제약도 존재합니다. 물소 뿔이나 전통 방식의 한우 힘줄을 구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고, 수입재료에 의존할 경우 활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게 됩니다. 정부 차원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활장들이 몇 명 있긴 하지만, 그 수는 손에 꼽을 정도이며 대부분 고령입니다.
반면 전통 활을 즐기는 국궁 동호회는 여전히 전국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의 활 대부분은 공장에서 제작된 플라스틱 혹은 강화목 소재의 활이며, 전통적인 복합궁을 사용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활을 쏘는 사람은 많지만, 활을 ‘만드는’ 사람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부에서는 전통 활 복원을 위한 레지던시나 공방 지원 사업이 시도되고 있지만, 활 제작에 필요한 긴 시간과 장인정신을 단기간에 실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활은 마스터하기까지 수십 년이 걸리는 기술이며, 대량 생산이 불가능한 공예입니다.
이춘복 장인은 최근 공방 옆에 작은 전시공간을 마련해 전통 활과 재료, 제작 과정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떠나면 이 활도 이제 끝이야. 마지막 활장이라 해도 뭐, 누군가는 기억해주겠지.”라며 조용히 웃었습니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엔 어떤 안타까움과, 아주 오래된 무게가 함께 실려 있었습니다.
잊힌 무기의 미학을 다시 꺼내다
활은 무기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싸우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고 제어하며 공존하려 했던 도구였습니다. 봉화의 전통 활은 그중에서도 가장 정교하고 섬세한 기술이 응축된 결정체였습니다. 나무의 휘어짐을 읽고, 뿔의 반발력을 길들이며, 힘줄의 유연함을 더해 만든 활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와도 같았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총이나 미사일 같은 현대식 무기를 가진 시대지만, 전통 활이 가지고 있던 미학과 기술, 그리고 그를 만든 장인정신은 여전히 우리에게 배울 것이 많습니다. 특히 ‘오랜 시간에 걸쳐 한 자루의 도구를 만드는’ 집중력과 그 안에 담긴 존중과 인내는, 빠르게 돌아가는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삶의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전통 활을 만들던 이들이 있었고, 그들이 나무와 힘줄과 대화하듯 세상과 대화하며 살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기술과 손끝의 기억이 단지 옛이야기로 사라지지 않도록, 지금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마지막 한 자루가 만들어지는 그날, 누군가는 다시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 활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 나무와 뿔,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통하는 소리가 아직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