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본 적이 있나요?
밤 10시 무렵, 학교나 회사의 하루가 끝나고, 도시가 슬그머니 침묵에 들어가기 시작할 즈음입니다.
그 시간에도 편의점 불빛은 한결같은 온도로 켜져 있습니다. 형광등 아래, 의자 두세 개가 놓인 그 공간에서 누군가는 캔맥주를 마시고, 누군가는 통화를 하며 헛웃음을 짓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말없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립니다.
가끔은 아무것도 사지 않은 채, 그저 앉아 있다가 조용히 일어나 가시는 분도 계십니다. 바로 어젯밤의 저처럼요.
그 시간대의 편의점은 유난히 조용합니다.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 포장지를 뜯는 소리, 멀리서 들리는 오토바이 엔진 소리까지. 모든 것이 작게 들리지만 존재감 있게 다가오는 시간이지요. 이 모든 일상의 소음들이 마치 배경 음악처럼 깔린 그곳에서, 사람들은 말없이 자신만의 시간을 견디고 계십니다.
편의점은 24시간 동안 깨어 있는 도시의 가장 작은 쉼터입니다. 뭔가를 사지 않더라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드문 공간이지요. 커피 한 캔을 들고 30분쯤 앉아 있어도, 누구도 쫓아내지 않습니다. 쾌적하지는 않지만, 묘하게 편안한 공간. 실내도 실외도 아닌 듯한 그 경계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일종의 도시적 유랑을 잠시 멈추게 됩니다.
저는 종종 이곳을 ‘현대인의 고요한 피난처’라고 부릅니다. 화려한 카페도, 번잡한 술집도, 익숙한 집도 아닌 제3의 장소. 인스타그램에 올릴 필요도 없고, 꾸밀 명분도 없는 그곳에서는 그저 존재하는 일 자체로 충분한 시간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건 요즘 같은 시대에 드문 경험이기도 합니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고, 아무도 나를 채근하지 않으며, 내가 나일 수 있는 자리. 편의점 앞은 그런 진귀한 장소입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그 자리에 담긴 작고 소중한 철학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입니다.
편의점 앞에서의 무기력은 무의미하지 않다
우리는 종종 무기력한 시간을 실패나 낭비로 간주합니다. 생산적이지 않고, 결과도 없으며,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편의점 앞에서 마시는 맥주 한 캔, 우두커니 앉아 있는 15분은 정신을 비우는 능동적인 무위(無爲)에 더 가까운 시간입니다.
이런 시간은 누가 보기에 게으름처럼 보여도, 그 자체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여백입니다. 뇌는 계속해서 움직이지만, 그 움직임에 스스로 힘을 빼주지 않으면 결국 탈진하게 됩니다. 편의점 앞에서의 그 무기력한 상태는, 어쩌면 몸과 마음이 보내는 작은 구조 요청일지도 모릅니다.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이 끊임없는 자기착취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타인의 감시나 강제가 아닌, ‘더 나은 나’라는 환상 속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몰아세우는 시스템. 편의점 앞에 앉아 있는 분들은 잠시 그 착취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아무도 노력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 머무는 그 시간은, 도리어 회복의 출발점일지도 모릅니다. 마치 숨을 참고 있다가 비로소 한 번 깊게 내쉬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 시간 속에서 우린 문득 삶의 리듬을 되찾습니다. 꼭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만 가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살아 있다는 건, 그저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때가 있다는 걸 조금은 실감하게 됩니다.
도시에 필요한 건 조용한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용기
편의점 앞 의자에 앉는 일은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자발적인 고독’을 선택한 이들입니다. 친구와의 약속이 있어도 아니고, 가족과 식사를 하러 간 것도 아닙니다. 혼자라는 사실을 의식하면서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도시는 고독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커플석이 기본인 카페, 네 명부터 예약 가능한 식당, 혼자 있으면 더 외로워지는 공간들 속에서, 편의점 앞은 ‘혼자인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어 줍니다.
혼자인 순간이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번 그 감각을 익히고 나면, 혼자 앉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따뜻하고 관대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곳에 앉아 본 사람들은 압니다.
“나 지금 조금 외로워”
“오늘 하루 좀 고단했어”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곳이 있다는 걸요.
그 자리는 대화가 필요 없는 공감, 말이 없어도 이해되는 시간의 공존이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그곳은 단순한 소비 공간이 아니라, 말 없는 안부가 오가는 도시의 변방이자, 가장 조용한 중심입니다.
편의점 앞이라는 익숙하고도 특이한 장소는 우리 안의 감정과 고요하게 마주하게 해 주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편의점은 도시의 양심
편의점은 인간적인 공간일까요, 비인간적인 공간일까요?
무인 계산대, 복권기계, 카드 리더기, AI 음료기. 모든 것이 자동화된 듯 보이지만, 여전히 편의점 안에는 사람의 손과 눈이 필요합니다. "손님 이거 유통기한 지났어요", "봉지 하나만 주실 수 있어요?", 이런 말들이 오가는 곳. 그 짧은 대화 속에 묘한 인간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편의점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존재도 그렇습니다. 비정규직이 대부분이며, 심야에 혼자 근무하는 경우가 많아 늘 불안과 피로 속에 있으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동네의 얼굴이 됩니다. "편의점 아저씨", "그 누나"라고 불리는 그들은 마을의 일원이자 도시의 표정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입니다.
도시는 점점 더 자동화되고, 익명화되고 있지만, 편의점은 여전히 약간의 온기를 유지하는 공간입니다.
그 온기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인간적 흔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편의점은 단순히 상품이 거래되는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를 품은 도시의 양심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편의점 앞, 철학이 앉아 있는 자리
우리는 왜 굳이 ‘편의점 앞’에 앉을까요?
에어컨이 나오는 실내도 아니고, 멋진 풍경이 보이는 것도 아니며, 도무지 ‘힙’하지 않은 그 장소에 말입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정지된 시간의 포인트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24시간 열려 있는 편의점, 멈춰 있지 않는 도시 속에서, 그 앞 의자에 잠시 멈춰 앉는 사람은 ‘내가 나를 잠깐 멈추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도시에 휩쓸리지 않고, 도시를 걷고 있는 존재가 됩니다.
철학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편의점 앞에서,
아무 말도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그저 앉아 있을 때.
그 순간, 우리는 생각이 아닌 존재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존재로 돌아간 인간은, 다시 생각을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