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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의 장례소리패, 마지막 길을 함께 걷던 사람들

by 조용한 성장 2025. 6. 12.

남도의 섬마을에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고유한 장례 문화가 존재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완도 지역의 장례소리패는, 이별의 슬픔을 노래와 북장단으로 품어내며 망자를 배웅하던 독특한 장례 풍습으로 기억됩니다. 조용한 섬마을 골목을 따라 울려 퍼지던 그 울림은 단순한 곡조나 구호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감싸는 공동체의 마지막 인사였습니다.

 

“슬픔은 덜고, 영혼은 달래며, 사람은 남는다”는 말이 이처럼 피부로 와 닿던 순간이 또 있을까요? 완도의 장례소리패는 망자의 넋을 달래는 동시에 남은 이들의 마음을 함께 추슬렀습니다. 장례라는 무거운 의례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어깨를 의지하며 슬픔을 나누었고, 그 속에서 이어져온 정서와 문화는 마을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줄기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소리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마을 어귀에 울려 퍼지던 북소리는 멈추었고, 소리패의 구성원들 역시 고령화로 인해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더 이상 그 장단을 배울 젊은 세대도, 그 울림을 필요로 하는 이들도 줄어드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묻습니다. 과연 이 소리를 잊어도 되는 걸까요?

 

이 글은 단순히 장례 문화의 변화를 기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소멸 위기에 놓인 지역 공동체의 목소리와, 그 속에 담긴 인간적인 온기와 배려를 다시금 돌아보고자 합니다. 누군가의 마지막 길을 함께 걸었던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우리는 지금 다시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때입니다.

완도의 장례소리패, 마지막 길을 함께 걷던 사람들
완도의 장례소리패, 마지막 길을 함께 걷던 사람들


장례소리패의 기원

장례소리패는 죽은 이를 마지막으로 배웅하는 데 있어 단순한 도우미가 아니라, 의례 전체를 이끄는 주체였습니다. 완도에서는 이들이 ‘곡패(哭牌)’ 혹은 ‘소리패’라 불렸으며, 상여를 앞세우고 고인을 모시는 행렬의 맨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길을 열었습니다.

 

소리패가 부르는 곡조는 지역마다 다르지만, 완도에서는 주로 남도 민요의 계열인 ‘상여소리’, ‘회심곡’, ‘상두소리’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소리들은 죽은 자를 달래는 동시에 산 사람들의 슬픔을 대신 울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회심곡은 불교의 영향을 받아 윤회와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그 선율 하나하나가 깊은 정서를 자극했습니다.

 

완도의 장례소리패는 통상 5~7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북잡이, 소리꾼, 나팔수 등이 각자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들은 장례가 있을 때마다 자발적으로 모였고, 오랜 세월 동안 마을마다 누군가의 부모, 형제, 이웃이 떠날 때마다 함께 울고, 함께 걸었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전문 예능인’이라기보다는, 공동체의 감정을 나누는 ‘사람’이었습니다.

 

망자의 길을 걷던 사람들

장례소리패의 핵심은 바로 ‘걸음’입니다. 완도의 장례 문화는 대부분 걸어서 고인을 모시는 행렬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차량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인의 삶을 함께 기억하고, 그 존재를 마을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배웅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 길은 종종 한 시간에서 두 시간까지도 걸렸습니다. 좁은 섬길을 따라, 바닷가를 지나, 능선 너머 공동묘지까지. 소리패는 그 길을 노래로 채웠고, 가족들은 그 울림에 눈물을 흘리며 뒤를 따랐습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북소리였습니다. 가슴을 울리는 낮은 장단은 슬픔을 흔들어 일으키고, 눈물보다 깊은 감정을 끌어올렸습니다.

 

소리패가 부르는 노랫말은 단순한 슬픔을 넘어, 고인의 생애를 담는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이 고을 김씨 영감님, 자식농사 잘 지었네, 곡식을 거두셨고, 인심은 넉넉했다지” 같은 구절은 고인을 단지 죽은 자가 아닌 ‘살았던 사람’으로 환기시켜 주는 힘이 있었습니다.

 

완도에서 활동했던 한 소리꾼은 말했습니다. “노래는 곡이지만, 말은 마음이죠. 그냥 운율 맞춰 부른다고 되는 게 아니고, 그 집안의 이야기를 알고, 사람의 정을 품어야 그게 진짜 소리지요.” 그 말처럼, 소리패는 마을 사람 모두의 감정과 추억을 짊어진 존재였습니다.

 

사라진 울림, 끊긴 연결

2000년대 이후, 장례 문화의 변화는 급속도로 일어났습니다. 병원 장례식장이 보편화되었고, 이동은 차량으로 대체되었으며, 장례 절차는 간소화되고 상업화되었습니다. 도시화와 핵가족화 속에서 마을 단위의 공동체 장례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고, 장례소리패 역시 활동을 이어가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완도 지역의 한 소리패 구성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젠 장례식장에 가면 다 똑같아요. 음악도 똑같고, 절차도 똑같고, 사람들도 정 없고. 우리 소리 넣을 데가 없어요.” 실제로 이제는 소리패가 필요 없는 장례가 대부분이며, 지역 행사로도 초청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옛날 이야기’로 밀려났고, 후계자도 없습니다. 과거엔 어르신들을 따라다니며 배우던 젊은이들도 이제는 도시로 떠났고, 전승 자체가 단절된 것입니다. 일부 지자체나 문화단체에서 ‘무형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실질적 전승보다는 행사나 전시 중심의 보존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더 안타까운 건, 이 장례소리의 소멸이 단순한 문화유산의 상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안에는 사람 간의 관계, 공동체의 연대, 그리고 정서적 치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누군가가 떠날 때, 더 이상 마을 전체가 함께 울어주지 않고, 그 이별은 고요하고 개인적인 일로 남게 됩니다.

 

끝이 아니라, 소리가 남는 자리

완도의 장례소리패는 단지 오래된 장례 풍습의 하나로만 기록되기엔 아쉬움이 많은 존재입니다. 그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람의 정서를 연결하고, 이별이라는 무거운 시간을 함께 나누던 공동체의 음성 그 자체였습니다. 고인을 위한 노래는 곧 남은 이들을 위한 위로였고, 북소리는 슬픔에 빠진 가족에게 전해지는 연대의 손짓이었습니다.

 

사람의 죽음은 개인의 종결이지만, 그를 떠나보내는 일은 사회의 몫입니다. 공동체가 망자를 어떻게 배웅하느냐는 그 사회가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고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완도의 장례소리패는 그 거울 속에서 오래도록 따뜻한 빛을 발해왔습니다. 누구나 돌아가신 이를 위해 북을 치고, 소리를 부르고, 노래 안에 그 사람의 삶을 담아낼 수 있었던 시절. 그 시절은 단지 향수가 아니라,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감각일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거의 들리지 않는 그 소리를, 우리는 어떻게 이어가야 할까요?

한 가지 희망은, 여전히 소수의 장례소리패 구성원이 마을 어귀를 지키며 언젠가 다시 소리를 낼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는 연습을 멈추지 않고 있고, 어떤 이는 과거 녹음자료를 모아보며 후대에 전해주려 애쓰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장례 대신 지역 축제에서라도 그 장단을 울려보려 노력합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음악을 보존하기 위함이 아니라, 공동체의 마지막 예의를 되살리기 위한 움직임입니다.

 

문화는 언제나 시대와 함께 변합니다. 장례의 방식도 달라질 수 있고, 삶을 기리는 방법도 변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변화가 ‘편리함’만을 추구하고, ‘정서’와 ‘공동체성’을 뒤로 미룬다면 우리는 결국 삶의 중요한 일부를 잃게 됩니다. 완도의 장례소리패는 바로 그 중요한 가치를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남는가? 죽음 이후에, 소리 이후에, 그리고 사람들이 떠난 후에도.

 

남는 것은 소리입니다. 들리지 않아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울림, 언젠가 누군가를 위한 마지막 길에서 다시 꺼낼 수 있는 정서의 언어. 우리는 그 소리를 다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단지 ‘옛날 방식’이 아닌, 사람과 사람을 잇는 방식이었음을.

 

완도에서 한 소리꾼이 말했습니다.
“사람이 떠나도, 소리는 남아요. 그 사람을 위해 우리가 부른 노래는, 어딘가 바람에 실려 남아 있을 겁니다. 들리지 않더라도, 남아 있어요.”

그 소리가, 오늘 우리의 마음 어딘가에서도 울리기를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완도의 장례소리패가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사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 소리 없는 장례에서 되찾은 기억

몇 해 전, 완도의 한 마을에서 마지막 장례소리패가 활동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90세를 넘긴 노인이 돌아가신 날, 오랜 세월 소리를 접었던 세 명의 어르신이 모여 북을 꺼내 들고 조심스럽게 장단을 맞췄다고 합니다. 연습도 없이, 몇십 년 만에 마을을 따라 걷는 그들의 발걸음은 떨렸고, 노랫말도 자꾸만 끊겼지만, 그 모습은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안겨주었다고 합니다.

 

그 소리는 고인을 위한 것이었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위안이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마치 돌아가신 분이 우리를 보며 웃고 있는 것 같았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진짜 장례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이후, 마을에서는 소리패를 다시 만들자는 작은 움직임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완도의 장례소리패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다시 북을 잡고, 소리를 잇겠다고 나선다면, 그 울림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이별의 길목에서, 아직 울려야 할 소리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단지 귀에 들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닿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 모두는 그 울림의 다음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