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는 한때 목화꽃이 하얗게 물결치던 고장이었습니다. 논두렁 옆 밭두렁까지, 가을이면 눈이 내린 듯 들판을 덮던 흰 꽃송이들. 사람들은 그것을 ‘솜꽃’이라 불렀고, 그 꽃은 겨울 이불이 되고, 아기 옷이 되며, 삶을 감싸는 온기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춘 이 목화의 풍경은, 사실 영주를 포함한 경북 내륙지방에선 20세기 중반까지도 매우 흔한 장면이었습니다. 논농사와 병행하던 목화재배는 가내 수공업과 연계되며, 섬유산업의 기초를 이루는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마을마다 목화 밭이 있었고, 해마다 수확기를 맞으면 여자아이부터 할머니까지 온 가족이 나와 솜을 땄습니다. 그리고 저녁이면 솜을 타는 소리, 물레 돌리는 소리가 마을을 채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디서도 목화밭을 보기 어렵습니다. 산업화, 값싼 외국산 섬유의 유입, 그리고 생활방식의 변화는 목화를,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한 삶의 방식을 급격히 밀어냈습니다.
이제 영주 사람들조차 잊은 목화의 기억을 다시 더듬어 보려 합니다.
흰 꽃의 잔상 속에 남은 노동, 공동체, 자연의 순환을 함께 되새겨보며 이 글을 시작합니다.
목화, 땅과 사람을 잇다
목화는 본래 열대 및 아열대 작물이지만, 한반도에는 고려 말부터 전래되어 조선시대에 널리 퍼졌습니다. 특히 경북 영주는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크고 토질이 배수가 잘 되어 목화 재배에 적합했습니다. 조선후기에는 ‘백면(白綿)’이라 하여 이 지역의 목화솜이 질이 좋기로 이름나기도 했습니다.
영주의 목화농사는 단순한 재배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벼농사가 끝난 후 경작지를 활용한 이모작이 가능했고, 여성과 노약자가 주요 노동력으로 참여할 수 있어 가계경제에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또, 목화솜을 직접 타고 물레로 실을 뽑아 옷감까지 짜는 과정이 모두 가정 내에서 이루어졌기에, 목화는 단순한 작물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였습니다.
목화를 심는 시기는 대개 음력 4~5월이었고, 수확은 10월부터 시작됐습니다. 꽃이 피고 진 자리에는 탐스러운 하얀 솜이 터지며 모습을 드러냈고, 그때부터 수확이 시작됐습니다. 손으로 하나하나 솜을 따야 했기에 손끝이 까지고 굳은살이 박이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수확한 목화는 햇볕에 말린 후 씨를 빼는 ‘타작’ 과정을 거쳤고, 이후에는 물레로 실을 잣고 베틀로 짜서 천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생산과정은 단순히 물질적인 결과물을 넘어서, 가족 공동체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매개가 되었습니다. 한겨울 따뜻한 방 안에서 물레를 돌리며 나누던 이야기, 베틀 소리에 맞춰 자장가를 부르던 밤, 그 모든 것이 목화와 함께한 시간들이었습니다.
흰 들판의 유산, 사라진 이유
영주의 목화는 1970년대 후반까지도 일부 농가에서 재배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를 끝으로 점차 사라지게 된 데에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산업화로 인한 직물 공업의 기계화와 대량 생산 체계의 도입이었습니다. 값싼 수입산 목화와 합성섬유가 시장을 점령하면서, 가내 수공업을 기반으로 한 전통 목화 농업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노동집약적인 구조였습니다. 목화는 심기부터 수확, 솜 타기, 실잣기, 옷감짜기까지 모든 과정이 사람의 손을 필요로 했고, 이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노동 강도가 매우 높은 일이었습니다. 도시 노동 시장이 확장되고 농촌 인구가 줄어들면서, 그 많은 손길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였습니다. 합성섬유의 등장은 빨리 마르고 관리가 쉬운 옷을 대중화시켰고, 전통적인 목면 옷감은 '불편하고 구식'이라는 인식 속에 밀려났습니다. 그 결과, 목화는 더 이상 ‘필수’가 아닌 ‘추억’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영주의 농업기술센터나 일부 민간 단체가 교육용이나 체험용으로 소규모 목화밭을 가꾸기도 하지만, 이는 상징적인 수준에 그칠 뿐입니다. 지역의 젊은 세대 중 상당수는 ‘영주가 목화의 고장이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기억을 짜는 사람들
다행히 아직 목화의 기억을 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주의 한 마을에서는 해마다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솜꽃 축제’를 엽니다. 몇 평 남짓한 밭에 목화를 심고, 아이들에게 솜 따는 체험을 하게 한 후, 그 솜으로 물레를 돌려 실을 잣는 시연도 함께합니다. 이 행사는 단순한 농업 체험을 넘어, 지역의 생활문화를 전승하려는 뜻 깊은 자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한 몇몇 장인들은 전통 베틀과 물레를 지키며, 실제로 목화를 길러 실을 뽑아 옷감을 짜는 작업을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이들이 만드는 옷감은 시장에서는 보기 힘든 촘촘한 짜임새와 고운 질감으로 인해, 최근에는 예술가나 공예가들 사이에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숫자는 극히 적고, 이들의 활동이 산업적으로 확대되기엔 현실적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지켜온 전통은 목화의 ‘기억’을 현재형으로 연결해주는 중요한 매개입니다.
사라진 들판을 기억하며
목화는 단순한 작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흰 들판을 배경으로 한, 수많은 노동과 이야기, 손의 기술과 계절의 흐름이 얽힌 복합적인 문화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린 손이 솜을 따고, 어머니가 실을 잣고, 할머니가 베틀에 앉아 천을 짜던 그 모든 풍경은, 오늘날 잊혀져 가는 농촌 문화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영주의 목화농사는 더 이상 경제적 가치는 크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남긴 정신적, 문화적 자산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효율성과 수익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질서, 지역 공동체의 리듬, 손의 기억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잊혀진 흰 들판을 그냥 흘려보낼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품고 있던 삶의 방식과 가치를 되살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목화는 사라졌지만, 그 꽃이 피웠던 삶은 아직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목화를 이야기합니다.
사라졌기에 더욱 간절한 그 기억을, 다시 흰 들판 위에 피워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