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고흥의 해안선을 따라 걷다 보면, 오래된 염전터와 낡은 소금창고들이 바닷바람에 씻기듯 무심히 서 있는 풍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는 한때 삶의 터전이었던 자염장이 숨 쉬고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췄지만, 이곳 고흥은 한 세기 전만 해도 자염 -즉, 바닷물을 가마에 끓여 소금을 만들던 자염법- 으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소금 생산지였습니다.
자염장은 단순히 소금을 만드는 공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다와 사람, 불과 노동이 빚어낸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가족 단위로 운영되던 자염장에는 하루 종일 불을 지피고, 소금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난 아이들이 있었고, 굵은 땀방울로 하루를 마무리하던 어른들의 손길이 녹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고흥의 자염장은 거의 모든 기능을 멈췄고, 기억하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대규모 천일염의 등장과 산업화, 생활양식의 변화는 이 고유한 전통 염법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씁니다. 고흥 자염장의 이야기를 단순한 향수나 과거의 기술로만 소비하지 않고, 그것이 담고 있는 생태, 노동, 공동체, 그리고 기억의 가치를 다시 조명하고자 합니다. 잊혀진 풍경을 기록하는 일은 곧 우리 삶의 결을 지키는 일이라는 믿음에서 시작된 여정입니다.
자염의 방식
자염은 말 그대로 ‘불을 이용해 바닷물을 끓여 얻는 소금’입니다. 고흥에서 자염이 활발하게 이뤄졌던 시기에는, 해안가 곳곳에 자염장이 존재했고, 염부들은 이른 새벽부터 바닷물을 퍼올려 큰 가마솥에 부었습니다. 그 가마는 흙과 돌, 때로는 조개껍데기로 만든 단단한 구조였고, 밑에는 장작불을 때워 끓였습니다. 하루 종일, 그리고 이틀을 꼬박 지새워야 한 줌의 굵은 소금이 솥 아래에 가라앉았습니다.
그 과정은 매우 고되고 단순한 반복이었습니다. 장작을 쪼개는 일부터 바닷물의 염도를 감지해가며 끓이는 일까지, 모든 게 경험에 의존했습니다.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손끝과 눈빛, 그리고 몇 세대에 걸쳐 전해 내려온 감각이 전부였습니다.
자염 소금은 특유의 단단한 결정과 미세한 감칠맛으로 유명했습니다. 천일염보다 입자가 굵고 불순물이 적어, 과거에는 왕실에도 진상되었고, 민간에서는 약용으로도 쓰였습니다. 그러나 생산량은 적었고, 너무나 많은 노동을 요구하는 방식이었기에 언제나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염은 고흥의 자연환경과 어우러져 독자적인 문화를 이뤘습니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큰 해역, 바위 지형, 적당한 기후—이 모든 것이 맞물려야만 자염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고흥만의 자염장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온 지역민들의 삶 자체였습니다.
불을 지키던 사람들
자염장은 언제나 ‘불’로 시작해 ‘소금’으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 불을 지키는 일은 단순히 장작을 넣는 작업 이상이었습니다. 자염장에서는 하루 24시간, 장작불이 꺼지지 않도록 교대하며 불을 지켰습니다. 겨울에는 칼바람을 막아가며 불가에 붙어 있어야 했고, 여름에는 증기와 연기로 가마 옆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사람들은 웃으며 일했습니다. 가족 단위로 운영되던 자염장에서는 삼시세끼를 한 솥에서 먹으며, 삶과 일이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장작을 옮기며 놀았고, 어른들은 소금을 긁어모으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 공동체의 기억은 지금도 일부 주민들의 가슴에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70~80년대를 마지막으로 고흥의 자염장은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천일염 생산이 확대되면서 자염의 경제성은 점점 낮아졌고, 남아 있던 몇몇 장인들도 고령화로 인해 가마를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통 자염장은 점차 흙더미로 덮였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 건물이나 주차장이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흥의 몇몇 마을에서는 자염을 다시 복원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2000년대 중반, 고흥군청과 지역 문화단체가 협력해 전통 자염장을 복원하고, 교육 프로그램과 체험 관광으로 연결해 보자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높은 유지비용과 장인의 부족, 무엇보다 대중의 낮은 인식으로 인해 그 시도는 몇 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자염은 단지 기술이 아니라 시간과 사람, 환경의 총체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되살리려면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철학과 공동체의 재구성이 필요했습니다. 불을 지키던 사람들이 사라졌을 때, 소금의 의미도 함께 옅어졌습니다.
소금보다 짠 기억
고흥의 자염장은 물리적으로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자염장에서 자라난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가마 옆에 앉아 장작불을 보며 졸던 오후, 소금물이 끓는 소리와 연기 자욱한 창고 안 풍경이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그때는 힘들어도 좋았지.”라고 말하는 할머니는, 자신이 만든 소금이 지금보다 훨씬 맛있었다고 말합니다. 비록 과학적 분석이나 유통망은 부족했지만, 사람들은 그 소금에 믿음을 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소금이었기 때문입니다. 손의 온도와 땀의 농도가 그대로 배어 있는, 말 그대로 사람의 소금이었습니다.
자염장은 기술로 복원되기 어렵습니다. 그 안에 담긴 시간과 기억, 공동체의 연결 고리는 수치나 도면으로 옮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흥의 자염장은 그래서 단지 한 산업의 소멸이 아니라, 한 문화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이제 고흥의 자염장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라지면, 소금보다 짠 기억도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기록하고 남기는 일이 더 절실해졌습니다. 자염장은 다시 살아날 수 없을지 몰라도, 그 정신과 기억은 우리가 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와 불, 그리고 사람
소금은 음식의 기본이지만, 삶의 기본이기도 했습니다. 고흥의 자염장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절실히 보여준 공간이었습니다. 바다에서 온 물을 불로 끓이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하루를 버텨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금은 단지 양념이 아니라, 공동체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효율성과 경제성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고흥 자염장의 이야기는, 그 이면에 있는 비효율의 가치, 공동체의 기억, 손의 감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일깨워줍니다.
지금 고흥의 해안에 남은 몇 개의 자염장 터는 대부분 잡초에 덮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땅을 밟는 순간, 옛날의 연기와 소금 냄새가 어렴풋이 되살아나는 듯합니다.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는 지금 기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록이 또 다른 기억을 부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자염장은 사라졌지만, 그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금보다 짠 기억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귀한 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