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포천의 외곽, 한적한 산자락 아래로 들어서면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오래된 한옥과 그 옆의 낮은 작업장, 그 안에서는 불꽃이 살아 숨 쉬고, 무쇠 냄비처럼 묵직한 망치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바로 '화덕유기장'이 이뤄지는 공간입니다. 1200도가 넘는 화덕 앞에서 장인은 금속을 다스리고, 붉은 불덩이를 손으로 다뤄가며 유기(鍮器)를 만듭니다. 이 전통은 단순한 공예가 아니라, 수백 년 간 한국의 식문화와 예술을 함께 해온 유산입니다.
포천은 조선 시대부터 유기의 주 생산지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화덕유기’는 거푸집이 아닌 망치와 불로 형태를 다듬는 전통 방식으로, 전국에서도 몇 남지 않은 장인들만이 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이제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수요는 줄고, 유기 그릇의 가치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으며, 이 기술을 배우려는 젊은 세대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게 유기장은 장인의 노쇠함과 함께 천천히 꺼져가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그리고 그 잃어버리는 것이 단지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 한 시대의 지혜와 아름다움이라는 점을 기록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화덕유기장’이라는 말조차 낯선 이들이 많아진 지금, 포천의 이 작은 불꽃을 누군가는 기억하고 남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합니다.
불을 다루는 사람들
화덕유기란 단순한 금속 가공이 아닙니다. 이는 불과 망치, 그리고 사람의 손끝이 함께 만들어내는 일종의 ‘연금술’에 가깝습니다. 전통 유기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들어지는데, 그 비율과 온도, 망치질의 강도 하나하나가 제품의 품질을 좌우합니다. 그야말로 오차가 허용되지 않는 고도의 숙련 노동입니다.
포천의 화덕유기장은 다른 지역과 달리, 전통적인 '토화덕'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토화덕은 조선 후기부터 사용되어 온 구조로, 열을 고르게 전달하는 특성이 있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가 유리합니다. 현대식 가마가 아닌 이 화덕은 장인의 감각으로만 온도를 조절할 수밖에 없기에, 이곳에서 유기를 만든다는 것은 곧 수십 년 경험이 필요한 예술 행위입니다.
화덕 앞에 서 있는 장인의 손은 거칠고 단단합니다. 구리와 주석을 녹이고, 그것을 부어 만든 덩어리를 불에 달군 후 망치로 두드리는 일은 하루 종일 반복됩니다. 수십 번의 망치질 끝에야 비로소 유기의 모양이 잡히고, 그 위에 장인의 서명이 새겨집니다. 그 한 점의 그릇은 마치 살아 있는 물건처럼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습니다.
장인은 말합니다. "이건 그냥 그릇이 아니라, 내 시간과 체온이 들어간 그릇이야." 그 말 속에는 단순한 제품이 아닌, 존재로서의 유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화덕유기는 공장에서 찍어낸 유기와는 전혀 다릅니다. 같은 그릇이 단 하나도 없고, 쓰면 쓸수록 색이 깊어지는, 사람과 함께 나이 드는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유기의 쇠락과 현대의 외면
유기는 한때 한국 식탁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제사상은 물론이고, 귀한 손님에게 내는 그릇은 유기였으며, 결혼 예물로 유기 한 벌을 장만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유기의 무게감, 온도 유지력, 독특한 금속광택은 단순한 기능을 넘어서 미학이었고, 예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습니다. 스테인리스, 플라스틱, 세라믹 등 가볍고 싸고 관리하기 쉬운 그릇들이 보편화되면서 유기는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가격'과 '관리의 번거로움'이 소비자들의 발길을 멀어지게 했습니다. 유기는 사용 후 바로 닦고, 잘 말려야 산화되지 않습니다. 또 연마제 없이 닦아야 본래의 색을 유지할 수 있기에 현대인의 빠른 생활 리듬과는 잘 맞지 않습니다.
포천의 화덕유기장이 특히 어려운 이유는 전통방식을 고수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방식은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고, 가격 경쟁에서도 불리합니다. 그러다 보니 공예품으로서의 수요는 간혹 있지만, 일상용품으로서의 유기의 수요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전통문화재로 지정된 몇몇 장인들만이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그마저도 후계자 문제로 위태로운 상태입니다.
실제로 포천의 한 화덕유기장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수십 개의 유기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주문이 몇 달에 한 번 들어올까 말까 한 수준입니다. 장인은 그 사이 틈을 타서 유기 수리나 단체 전시용 작품을 만드는 식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 일을 물려주고 싶은데, 물려줄 사람이 없어요. 아들은 이 길 안 가겠다고 했고, 배우러 오는 사람도 없어요.”
그 말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수백 년 이어진 기술이 단절된다는 건, 단지 한 사람의 직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삶의 방식이 사라지는 일입니다. 그렇게 유기는 점점 더 전시관 유리장 속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불꽃 속에 남은 마지막 온기
포천의 유기장은 단지 유기를 만드는 장소가 아닙니다. 이곳은 한 인간의 삶, 한국 금속공예의 정수, 그리고 불과 금속이 만들어낸 예술의 극한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장인의 손끝은 기계보다 더 섬세하고, 망치는 악기처럼 울림을 갖고 있습니다. 그 울림은 단순한 노동의 소리가 아니라,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증거입니다.
이 장인은 여전히 새벽에 작업장 문을 열고, 화덕에 불을 피웁니다. 오늘은 작은 유기 접시를 만든다고 합니다. “크지 않아도 돼. 사람들 손에 닿는 물건이면 그걸로 충분해.”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접시는 한 점 한 점이 모두 다릅니다.
화덕유기장의 가치가 단지 '전통 공예'라는 데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에 대한 신뢰와 경외감, 그리고 느림의 철학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삶에 매우 귀중한 메시지를 줍니다. 우리는 너무 빠르게 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화덕유기장은 우리에게 말없이 묻습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만들고 있느냐”고.
포천의 불꽃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불꽃을 지켜볼 사람, 함께 온기를 나눌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을 뿐입니다.
유기를 기억한다는 것, 장인을 기억한다는 것
유기 한 점에는 수십 년의 기술과 땀이 담겨 있습니다. 포천의 화덕유기장에 남은 불꽃은 단지 금속을 녹이는 열이 아니라, 삶과 전통, 그리고 예술에 대한 끈질긴 신념의 상징입니다.
사라지는 것은 시간의 순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사라짐을 무관심으로 두고볼 것인가, 아니면 기억하고 존중하며 이어갈 것인가. 유기를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장인을 기억한다는 것이고, 장인을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문화를 지켜왔고 앞으로 어떤 문화를 만들고 싶은지를 묻는 일이기도 합니다.
포천의 화덕유기장은 지금도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유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불과 금속, 그리고 사람의 손이 빚어낸 이 아름다운 춤이 앞으로도 오래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언젠가 다시 누군가의 손끝에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