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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버리고, 분류하고, 기억한다 – 분리수거장에서 시작된 성찰

by 조용한 성장 2025. 7. 4.

도시의 모서리에 늘 존재하지만, 누구도 오래 머무르지 않는 공간. 분리수거장은 그런 곳입니다. 사람들은 거기서 조용히, 빠르게, 무언가를 ‘버립니다’. 더는 필요하지 않은 것, 수명을 다한 것, 흔적을 남기고 사라져야 할 것들. 포장지, 병, 캔, 플라스틱, 종이.

그곳은 말하자면 일상의 퇴장 장면이 쌓이는 무대입니다. 늘 무심한 표정으로, 바쁘게 들고 와 무언가를 내려놓고, 서둘러 등을 보이고 돌아서는 공간. 냄새가 나고, 손이 더러워지고, 어쩐지 머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곳.

하지만 바로 그 분리수거장에야말로,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단서들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무엇을 샀고, 어떻게 소비했고,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버림’은 단순한 폐기가 아니라, ‘기억의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니까요.

이 글은, 도시에서 가장 침묵하는 장소이자, 동시에 우리 삶의 가장 솔직한 뒷모습을 담고 있는 분리수거장이라는 공간을 천천히 바라보는 시도입니다. 그곳에서 조용한 성찰을 시작해보려 합니다. 가장 소외된 공간에서 마주한 우리 자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버리고, 분류하고, 기억한다 – 분리수거장에서 시작된 성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버리고, 분류하고, 기억한다 – 분리수거장에서 시작된 성찰


익숙한 손놀림, 그러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행동

분리수거를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이 없습니다. 시간은 짧고, 몸짓은 반복적입니다. 비닐을 뜯고, 플라스틱 병을 눌러 찌그러뜨리고, 라벨을 떼어냅니다. 그 손놀림에는 어느 정도의 노련함과 무관심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누군가는 밤늦게 몰래 나옵니다. 분리수거장이 낮에는 민망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고급 아파트 단지일수록, 그 공간은 마치 '사회적 신분이 중단되는 곳'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정장을 입고 돌아온 퇴근길, 습기 찬 플라스틱을 만지며 서성이는 그 순간. 사람들은 자신이 평소에 입고 있는 사회적 외피를 살짝 벗는 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아무도 보지 않기에, 사람들은 무심해지기 쉽습니다. 한 번이라도 플라스틱에 음식물이 묻은 채 버려지는 걸 본 적이 있다면 아실 겁니다. ‘이건 어차피 다 한데 섞이는 거 아니야?’라는 태도. 그러나 그런 태도 안에서야말로 우리가 ‘쓸모 없는 것’에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더는 다룰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는지에 대한 선택입니다. 분리수거는 단순한 분류 작업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이미 가치의 판단이 선행돼 있습니다.

 

쌓여가는 것들, 잊히는 것들

분리수거장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끊임없이 쌓이는 물건들입니다. 매일같이 나오는 쓰레기와 포장들, 다 먹은 음료수병, 택배 상자, 사용한 일회용기들. 우리는 소비한 것만큼 많은 ‘뒤처리’를 반복합니다.

누군가는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병의 개수를 보며 자신이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알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밀키트 포장용기만 쌓여 있는 걸 보며 자신이 얼마나 ‘혼자 먹는 식사’에 익숙해졌는지 새삼 느낀다고도 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무심코 버리는 것들이, 우리의 삶을 설명해주는 작은 지표가 됩니다.

특히 포장지. 유독 정성스럽고 고급스럽게 포장된 물건의 껍질을 버릴 때면 묘한 씁쓸함이 들기도 합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준비했던 선물의 포장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한때 마음을 담았던 것이, 이젠 손에 묻은 냄새와 함께 버려져야 할 물건이 됩니다.

 

그래서 분리수거장은 일종의 기억의 무덤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거기서 과거를 작게, 그리고 조용히 정리합니다. 누군가와의 마지막 흔적일 수도 있고, 어떤 기쁨의 끝자락일 수도 있습니다. 분리수거장은 기억이 가장 마지막으로 머무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사라지는 공간의 철학

요즘 많은 아파트 단지에서는 분리수거장을 점점 ‘보이지 않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하로 숨기거나, 담벼락 뒤로 가리거나, 더 깨끗하고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정리’하려 합니다. 이는 도시의 미감을 위한 선택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우리가 ‘버리는 행위’를 얼마나 꺼려하는지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버린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실패’를 드러내는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다 쓰지 못한 음식, 과소비한 물건, 포장만 요란했던 작은 실망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실패의 증거를,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숨기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흔적 없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쓰고, 소비하고, 때로는 실수하며, 어딘가에 무언가를 남깁니다. 분리수거장이야말로, 그 삶의 잔여물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공간입니다.

그렇기에 이 공간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곳을 통해, 무엇이 진짜 ‘쓰레기’이고, 무엇이 다시 순환될 수 있는 가치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분리수거장의 ‘분리’란 결국 판단과 성찰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쓰레기를 분류하는 것이자, 삶의 태도를 가늠하는 일입니다. 무심히 버리지 않고, 망설임 없이 버리지 않기. 그 단순한 태도가 우리 삶의 윤리를 보여주는 작은 실천이 됩니다.

 

묻고, 분류하고, 살아남는 삶의 자리

분리수거장은 묻지 않는 공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많은 질문을 던지는 자리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샀고, 무엇을 버렸는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떠나보내는가. 그 질문들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살아온 하루의 무늬를 확인합니다.

누군가는 그곳을 통해 자신이 너무 많이 소비하고 있음을 깨닫기도 하고, 누군가는 한참을 라벨을 떼다가 ‘왜 이렇게까지 포장이 많지?’ 하고 혼잣말을 하기도 합니다. 결국 그 작은 행위들이 ‘사는 방식’을 조정해 나가는 계기가 됩니다.

 

무언가를 버릴 때, 한 번쯤 천천히 손을 움직여 보시길 바랍니다. 그냥 쓰레기를 던지지 말고, 그것을 다룰 자격이 있는 존재로서 책임 있게 행동해 보시길 바랍니다. 분리수거장이 도시의 뒷모습을 감추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더 나은 삶을 가꾸기 위한 작은 문턱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 조용한 분리수거장에서, 우리는 삶을 조심스레 정리하고, 또다시 정리된 삶을 살아갈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곳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가장 인간다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