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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온다는 믿음으로, 버스정류장에서

by 조용한 성장 2025. 7. 2.

매일 아침, 버스정류장에서 사람들을 지켜보게 됩니다. 누군가는 서 있고, 누군가는 앉아 있으며, 또 누군가는 버스를 향해 달려옵니다. 그 익숙한 풍경 속에서도 묘하게 마음이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조용한 연대감이 느껴지곤 합니다.

이 글은 그 마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시작했습니다.

언젠가는 온다는 믿음으로, 버스정류장에서
언젠가는 온다는 믿음으로, 버스정류장에서


도시는 멈추지 않지만, 우리는 기다린다

버스정류장은 도시의 흐름 속에서 잠시 멈출 수 있는 드문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목적지와 속도 속에서 사람들은 이곳에 서서 멈추게 됩니다. 움직이기 위해 멈추는, 아이러니하면서도 소중한 시간이 시작되는 공간입니다.

도시는 언제나 분주하고 바쁘게 돌아갑니다. 각자의 일정과 시간표, 마감과 약속이 삶을 규정하고, 사람들은 그 흐름에 맞춰 빠르게 움직입니다. 하지만 버스를 타는 이들은, 그 속도와 리듬을 잠시 내려놓고 정해진 시간표에 몸을 맡깁니다. 통제권을 내려놓고, 기다림을 받아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수동적인 태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다스리는 고요한 수용의 태도입니다.

 

버스정류장에서는 모두가 잠시 평등해지는 듯합니다. 나이도, 직급도, 사회적 지위도 이 공간 안에서는 잠깐 접어둔 채,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그리고 버스는 언제나 약간의 예측 불가능함을 안고 도착합니다. 2분 일찍 도착하거나 5분쯤 늦기도 하지요. 그 작은 시간의 변동 앞에서, 우리는 다시금 '기다리는 존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기다림은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오히려 그 안에는 삶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이 숨어 있습니다. 멍하니 있으면서도, 그날의 바람과 햇살, 옆 사람의 발소리를 느끼게 되니까요. 복잡한 도시 속에서 그 10분이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실어 나르는 무언가를 기다릴 때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는 것은 단순히 이동수단만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다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다음 약속, 다음 장소, 다음 장면. 버스가 도착하면 우리는 그 ‘다음’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니 정류장은 물리적인 이동만이 아닌, 심리적인 이동이 먼저 시작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혹은 목적지가 없이도 버스를 타고 싶을 때가 있지 않으신가요? 그럴 때면 어디론가 가고 싶은 충동에 이끌려 핸드폰으로 아무 노선이나 찾아보게 됩니다. 그냥 이동하고 싶다는 마음. 그 자체가 위로가 되곤 합니다. 익숙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거나,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말이죠.

그런 순간, 버스정류장은 교통의 거점을 넘어서 사람의 정서가 쉬어가는 작은 정거장이 됩니다. 바람이 불고, 이어폰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고, 멀리 산을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그날의 피로와 사연이 녹아 있기도 합니다. 각자 다른 목적지를 향하지만, 같은 번호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런 풍경은 도시의 민낯이자, 우리 삶의 단면처럼 느껴집니다.

버스가 너무 늦는 날도 있습니다. 버스가 오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에 핸드폰을 연신 확인하고, 다른 노선을 검색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버스는 결국 도착합니다. 언젠가는 도착한다는 믿음이, 우리가 정류장을 떠나지 않고 서 있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 믿음은 어쩌면 우리 삶 전반에 걸쳐 놓여 있는, 조용하고 단단한 신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멈춰 있지만, 다음은 반드시 올 거라는 감각. 그래서 우리는 계속 기다리게 됩니다.


기다림과 동행 사이에서 피어나는 감각

정류장에 함께 서 있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동행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지만, 같은 목적지를 향해 조용히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묘한 공감이 흐르곤 합니다. 마치 '당신도 나처럼 오늘을 살아가고 있군요'라고 눈빛으로 말하는 듯합니다.

버스정류장에서 만나는 얼굴들에는 감정이 드러나기보다, 감정이 숨겨져 있는 듯한 인상이 강합니다. 피곤한 얼굴, 무표정한 얼굴, 혹은 약간의 기대가 서려 있는 얼굴.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들 모두의 표정 속에는 하루를 통과해온 이야기들이 조용히 담겨 있습니다.

그런 이들의 자세나 몸짓을 살펴보면, 삶의 무게가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어깨에 가방이 걸쳐 있고, 손에 들린 커피 잔, 말없이 땅을 바라보는 눈동자. 하지만 그 무게는 정류장이라는 공간 안에서 잠시 내려놓아집니다. 우리가 서로의 짐을 대신 들어줄 수는 없지만, 같은 공간에서 함께 기다린다는 사실만으로도 묘한 위로를 주곤 합니다.

버스가 도착하는 순간, 정류장에 머물던 그 짧은 공동체는 흩어집니다. 먼저 자리를 잡기 위해 서두르기도 하고, 가방을 들고 조심스럽게 차에 오르기도 합니다. 다시 개인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지만, 그 이전의 정적과 함께 있었던 시간은 마음속에 오래 남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함께였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같은 버스를 탄 사실이 아니라, 같은 정류장에서 같은 풍경을 바라봤던 그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끝을 향해 가는 중, 아직 도착하지 않은 우리

버스정류장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들’이 서 있는 곳입니다. 도착하지 않았다는 건 곧 여정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이지요. 그리고 그 여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정류장은 떠나기 위한 자리이자, 도착을 준비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 경계 위에서 우리는 어정쩡하게 서 있지만, 어쩌면 바로 그 어정쩡함이 인간적인 것 아닐까요.

 

정류장에 앉아 있으면 삶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분주한 하루 속에서 허용된 몇 안 되는 멈춤의 시간. 그 기다림은 때론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그 안에만 존재하는 고요함과 충만함이 있습니다. 정류장은 그 고요함을 가만히 받아주는, 도시 속의 작은 품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어떤 날은 버스를 놓치기도 합니다. 이유 없는 지연이나, 막차를 놓친 밤처럼 뜻밖의 공백이 생기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 순간조차도 삶의 일부로 남습니다. 기다린 시간이 헛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안에서 마음이 스스로를 수습하고, 다시 움직일 준비를 했던 것일 수 있습니다.

 

결국 버스는 도착하고, 우리는 또 다시 타게 됩니다. 삶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어딘가로 향하고 있고, 그 길에서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으며, 때로는 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길목마다, 버스정류장은 존재합니다.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만큼은, 조금 천천히, 고요하게, 다정하게 살아도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