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중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말없이 놓인 벤치가 눈에 들어옵니다.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주목받는 것도 아닌 그 자리는, 언제든 누구든 앉을 수 있는 곳이지요. 공원 벤치는 어떤 선언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앉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위에 가방을 두고, 몸을 기대고, 마음을 잠시 눕히곤 합니다.
저도 종종 그런 벤치에 앉아봅니다. 아무 목적 없이 앉기도 하고, 책 한 권을 들고 나와 오래 머물러 있을 때도 있습니다. 한 시간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어도, 누구 하나 쳐다보지 않습니다. 아무 말도 필요 없고, 어떤 행동도 강요되지 않는 자리. 벤치는 도시에서 유일하게, ‘존재만으로 충분한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햇빛은 나뭇가지 사이로 조용히 스며들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옵니다. 지나가는 이들이 흘려보낸 소란함 속에서도 이상하게 고요한 공간. 벤치 위에 앉아 있으면, 내가 멈췄다는 사실보다 세상이 여전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더 선명해집니다. 도무지 정지할 수 없는 도시 속에서, 나만이 잠깐 쉬어갈 수 있다는 권리를 느끼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공원 벤치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자리에 앉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곧 ‘당장 도착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인정하는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그 자세가 주는 평온함이, 벤치를 단순한 구조물 이상의 공간으로 만들어 줍니다.
말이 없는 공원 벤치. 지금부터 그곳에 앉아 사색한 것들을 조금은 두서없이 적어보려 합니다.
도시의 주변부에 머문다는 감각
도시에서 벤치에 앉는 일은, 종종 무의미해 보이기도 합니다. 빠르게 움직이고, 효율을 따지고, 목적에 집중하는 도시에선 ‘그냥 앉아 있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벤치에 앉는다는 것은, 그 도시의 본류를 잠시 벗어나는 일입니다.
공원의 벤치는 대체로 길목이나 중심이 아닌 ‘주변’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 옆에, 혹은 길에서 살짝 벗어난 위치에 놓여 있지요. 그 주변성은 곧 우리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늘 핵심이 아닌 채로 살아갑니다. 회사에서, 관계 안에서,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이든 대부분은 ‘주인공’이 아닌 채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 존재들에게 벤치는 묘한 위안을 전해 줍니다. 중심이 아니어도, 의미가 있다는 메시지를 조용히 품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주변부에서 바라본 도시는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느리게 걷는 사람들, 산책 나온 반려견, 나무 그림자 아래 책을 읽는 어르신,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 중심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벤치에서는 선명해집니다. 이토록 평화로운 세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살아갑니다. 도시는 분명 바쁘지만, 그 안에는 이렇게 느리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함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앉아 있음은 결국 '존재한다'는 증거
공원 벤치에 앉아 있으면, 나 자신을 더욱 또렷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걷고 있을 때보다, 일하고 있을 때보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보다도 더욱 그렇습니다. 아무런 설명 없이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건, 있는 그대로의 내가 괜찮다는 일종의 확인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는 대부분 타인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를 규정하게 됩니다. 그 시선은 때로 과도하고, 때로는 무심합니다. 그러나 벤치 위에 앉은 저에게는, 그런 시선조차 크게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시선이 멀어지고, 나만의 시간이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앉아 있다는 단순한 행위는, 사실 꽤나 큰 용기이기도 합니다. 나의 하루를, 나의 시간을, 남들과 같은 속도로 흐르게 두지 않겠다는 선택. 누군가에게는 여유처럼 보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포기처럼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것이 존재의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저도,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비록 느리게라도 증명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기다리는 자리에 앉는다는 것
공원 벤치에는 일종의 ‘기다림의 태도’가 스며 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일 수도 있고,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일 수도 있고, 스스로가 정리되기를 기다리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요. 뚜렷한 목적 없이 앉아 있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도 급하지 않고, 어떤 급박함도 강요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말입니다.
도시는 언제나 목적지로 사람을 몰아갑니다. 그 목적이 직장이든, 약속 장소든, 가야 할 이유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여하지요. 그러나 공원 벤치에 앉은 사람에게는 그 목적이 희미해 보입니다. 이곳은 ‘잠깐 멈춘 사람들’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지나가고, 햇살이 닿고, 아이가 뛰어가고, 반려견이 킁킁대고, 노인이 가만히 숨을 고르는 풍경 속에서, 우리도 스스로를 조용히 느끼게 됩니다. 어쩌면 벤치에 앉는다는 것은, 기다림의 감각을 회복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나를 기다리는 일, 마음을 기다리는 일.
그리고 그 기다림은 늘 누군가를 향한 것만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만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흔히들 우리는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말만 떠올리지만, 사실 벤치에 앉은 사람들은 가장 먼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래 잊고 있던 감정,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 마음, 놓치고 흘려보낸 생각들을 다시 마주할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벤치에 앉는 사람은 '쉬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기다림은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다음을 위한 숨 고르기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공원의 벤치는 단순한 휴식 공간이 아니라 존재와 재시작 사이의 작은 다리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본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아, 저 사람은 지금 세상을 좀 더 천천히 살기로 했구나." 그리고 때때로 그 사람은 저 자신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천천히 걷고, 잠깐 멈춰 앉고, 조용히 나를 기다리는 삶. 공원 벤치는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살며시 초대하고 있습니다. 말없이, 조용하게, 그러나 단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