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를 기다리기엔 애매하고, 굳이 몇 층 오르자니 조금은 숨이 찰 때. 그럴 때 우리는 계단을 선택합니다.
별생각 없이 오르고 내리는 그 계단 위에서, 어쩌면 우리는 삶을 가장 명료하게 느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계단은 우리에게 물리적인 고됨만을 주는 공간이 아닙니다. 걸음마다 힘이 들고, 무릎이 무거워지며, 점점 숨이 차오르지만, 그 안에는 도무지 수평적이지 않은 인생의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올라가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고, 내려가는 일은 무언가 아쉬움을 남깁니다. 멈추어 서 있는 순간조차도, 우리는 높이와 방향을 의식하게 됩니다.
왜 이 이야기를 쓰는지요?
계단은 도시의 가장 단순한 구조물 같지만, 오히려 그 단순함 속에서 인간의 고독, 의지, 변화, 그리고 생각을 길러내는 철학적인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계단에서 마주친 작고도 깊은 사유들을 함께 나눠 보려 합니다.
올라간다는 일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누구나 한 번쯤,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다 말없이 한숨을 쉰 적이 있을 겁니다. 그 순간, 계단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몸으로 느끼게 해 주는 장치가 됩니다. 몇 계단만 올라가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숨이 턱에 찰 때, 우리는 삶이 결코 평탄한 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립니다.
계단을 오른다는 것은 하나의 결심입니다. 특히나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계단은, 목적이 없다면 도저히 오르지 못할 공간입니다. 몸이 무겁고 마음이 피곤한 날, 오히려 엘리베이터보다 계단을 택한 사람은 어쩌면 그 순간의 무기력을 이겨보려는 의지를 다지고 있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마다 오르는 속도가 다르고, 멈추는 타이밍도 다릅니다. 누군가는 가볍게 뛰어오르고, 누군가는 한 계단 한 계단을 쉬어가며 올라갑니다. 그 모습들을 보면, 마치 인생이라는 긴 계단을 오르는 각자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누군가는 빨리 가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누군가는 느리지만 묵묵하게 끝까지 오르지요.
계단은 말합니다. 올라가는 일이 어렵다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오히려 오르겠다는 결심 자체가 이미 대단한 일이라고요.
멈춰 설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공간
계단은 신기한 공간입니다. 누구도 계속 걷기만 하라고 강요하지 않지요. 중간에 멈춰 설 수도 있고, 돌아볼 수도 있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 점에서 계단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도시 공간 중 가장 관대한 장소입니다.
어떤 날은, 생각이 많아 일부러 계단을 택하기도 합니다. 지하철에서 나와 지상의 출구까지, 또는 회사 건물의 3층에서 5층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조용히 걸을 수 있습니다. 걸으면서 마음속을 정리하고, 괜한 생각도 해보고, 어쩌면 눈시울도 훔치고.
계단에서 멈춘다는 건 단순히 다리가 아파서가 아닙니다. 어쩌면 지금 내 상태를 잠시 확인하기 위한 ‘정지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계속 오를 수 있을지, 아니면 잠시 쉬어야 할지. 계단은 우리에게 물어옵니다. "괜찮아요? 아직 갈 힘은 있나요?"
도시는 사람에게 속도를 강요합니다. 하지만 계단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위에 멈춰 선 사람을 누구도 나무라지 않지요. 계단은 그렇게, 멈춰도 되는 공간입니다. 더 이상 못 가겠다고 말할 수 있는, 드문 장소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멈춤이, 다시 오를 힘이 되어 주기도 합니다.
내려가는 일에도 품위가 필요하다
내려가는 일은 쉽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발, 또 한 발 내려가며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선 오히려 더 신중해야 하니까요.
계단을 내려갈 때는 시선이 자연히 바닥을 향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실수를 피하고자 하는 본능일지도 모릅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어떤 선택은 내려놓는 것이고, 어떤 변화는 물러나는 것이며, 어떤 결심은 더 이상 올라가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내려감’이 꼭 후퇴는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안전하고 단단한 방식의 자기 보존일 수도 있지요.
계단을 내려가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돌아봅니다. 아까 그 벽의 낙서, 지나친 사람의 뒷모습, 창문 밖의 풍경. 내려갈 때 보이는 것들이 종종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더 천천히, 더 넓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려가는 시간은 종종 깨달음의 시간입니다. 무언가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잃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무게를 알게 되었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계단을 내려가는 이들의 걸음은, 결코 초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용하고 품위 있는 이해의 몸짓입니다.
계단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을 때, 전기가 나갔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계단의 존재를 떠올립니다.
그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벽 뒤쪽의 비상구처럼 조용한 계단. 하지만 그곳은 항상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조용히, 아무 말도 없이, 언제든 당신이 선택해 주기만을 기다리며.
계단은 눈에 띄지 않는 구조물입니다. 화려하지 않고, 눈길을 끌지 않으며, 사람들의 사진에 잘 담기지도 않지요. 하지만 어쩌면 그런 익명성 덕분에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누구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누구의 이름도 요구하지 않는 공간. 그렇기 때문에 더 자유롭고 더 솔직할 수 있는 자리.
계단은 우리에게 묻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거길 가려 하는지, 얼마나 걸릴 예정인지. 단지 당신이 한 발을 내딛기만 하면, 그 다음을 묵묵히 열어 줄 뿐입니다. 목적이나 방향, 속도보다 중요한 건 '걸음' 그 자체임을 계단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유에서든, 오르거나 내리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입니다.
계단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닙니다.
그건 무언가를 다시 해보겠다는 마음일 수도 있고,
잠시 내려놓겠다는 다짐일 수도 있고,
혹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몸을 움직이겠다는 본능적인 충동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동기이든, 계단은 그것을 가볍게 받아 줍니다.
“그래, 천천히 해도 괜찮아.”
“이 정도면 잘하고 있는 거야.”
“잠깐 쉬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계단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것도 우리가 가장 힘들고, 고단하고, 지친 순간에.
그렇기에 나는 종종 계단에서 사람의 삶을 봅니다.
바쁜 아침, 발소리를 부지런히 내며 위층으로 뛰어오르는 젊은 직장인.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조심조심 내려가는 노부부.
그리고 때로는, 계단 중간쯤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누군가.
우리는 모두 계단 위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누구는 오르고, 누구는 내리고, 누구는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누구의 걸음도 틀리지 않았고, 누구의 속도도 느리지 않습니다.
각자의 리듬과 방향이 있을 뿐이지요.
삶은 종종 '어디에 도착했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걸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계단은 그 진실을 조용히 증명하는 공간입니다.
결코 쉬운 길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더 잘 알게 되고, 누군가의 걸음에 공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계단을 걷습니다.
천천히, 조용히, 나의 속도로.
누가 옆에 있든 없든, 누가 내 앞을 걷든 뒤를 걷든,
이 걸음이 결국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한 발, 또 한 발 딛는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나를 다시 살게 하는 유일한 리듬일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