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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수직으로 만난다

by 조용한 성장 2025. 6. 27.

엘리베이터는 도시의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데 가장 먼저, 가장 마지막으로 마주하는 공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자주 타고 내리며, 너무 익숙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 작고 낯선 공간이야말로 도시의 삶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엘리베이터는 아주 작은 공간이지만, 동시에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는 세계입니다. 아침에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낮에는 택배기사와 배달원이 잠깐 머물며, 저녁에는 퇴근한 이들이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다시 오릅니다. 이 수직 상자 안에서 우리는 누군가와 아무 말도 없이, 가까운 거리에 서서,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흘러갑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요?

엘리베이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상들이 우리의 고독, 연결, 그리고 인간다움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그 조용한 철학을 붙잡고자 시작됐습니다.

우리는 매일, 수직으로 만난다
우리는 매일, 수직으로 만난다


침묵의 규칙과 어색한 공존

엘리베이터 안에는 분명한 규칙이 없습니다. 법도, 매뉴얼도, 경고문도 없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 예절’이라는 암묵적인 규범을 따라갑니다. 그것은 누가 먼저 타고, 어느 위치에 서고, 눈은 어디를 향해야 하고, 어떤 행동은 삼가야 한다는 식의 조용한 질서입니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그 규범을 배우지 않았지만 아주 잘 따릅니다.

예컨대,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습니다. 정면의 거울을 바라보거나,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말을 걸지 않습니다. 단 몇 초간의 동승이지만, 그것은 무척 긴밀한 거리의 침묵입니다.

 

이 침묵은 불편함이자 동시에 배려입니다. 누군가 말 한마디를 꺼내면 그 어색함이 깨질까 조심스럽고, 또 누구 하나 불편해할까 스스로 억제하게 됩니다. 이것은 도시가 만들어낸 하나의 생존 기술일지도 모릅니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 서 있어야만 하는 공간이기에, 거리를 두는 유일한 방식이 바로 말 없는 공존입니다.

하지만 이 침묵은 때로, 묘한 유대감으로 변합니다. 짧은 웃음, 잠깐의 눈인사, 층수를 눌러주는 손짓. 아주 작고 사소한 행위들 속에서 우리는 "나는 당신을 불편하게 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연대감을 느끼게 됩니다. 말 없는 배려. 그 짧은 시간 속에 오가는 도심의 인사.

 

거울 속 나와 다시 마주치는 시간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거울은 단순한 장식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장애인, 유모차 이용자들을 위한 설치였겠지만, 어느새 우리는 그 거울에 기대어 자신을 확인하곤 합니다. 출근길, 넥타이를 다시 조이고, 퇴근길,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습니다. 이 순간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상상하면서, 다시금 나를 연출하는 시간입니다.

흥미로운 건, 이 거울을 바라보는 동안 우리는 보통의 거울과는 다른 감정을 갖는다는 점입니다. 집에서의 거울은 사적이지만, 엘리베이터의 거울은 타인의 시선이 엿보이는 공적 거울입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거울 속의 나를 점검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 점검이 꼭 부끄럽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거울 속에서 뜻밖의 자신을 만납니다. 생각보다 피곤해 보이는 눈빛, 말없이 굳은 입술, 어딘지 낯선 인상. 도시에서 너무도 바쁘게, 너무도 타인의 시선에만 맞춰 살아온 나를 그곳에서 잠시 멈추어 바라보게 됩니다.

이 짧은 거울의 순간은 어쩌면 자기 반성의 시간입니다. 단 몇 층 오르내리는 그 사이에, 우리는 자신의 표정을 읽고, 하루를 돌아보며, 아직 다 끝나지 않은 오늘을 스스로 다독입니다. 도시가 허락한 가장 짧은 ‘나 자신과의 면담’이 그 안에서 일어납니다.


타인의 존재를 감각하는 순간

엘리베이터는 타인을 예민하게 감지하게 만드는 공간입니다. 무언가가 부딪치거나, 누군가가 갑자기 말을 걸거나, 층이 아닌 비상 버튼이 눌리는 상황까지, 우리는 이 작고 밀폐된 공간에서 무수한 가능성을 본능적으로 경계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작은 배려가 도드라집니다. 예를 들어, 내가 타기 위해 문을 잡아준 누군가, 아이와 함께 탄 부모에게 자리를 비켜주는 사람, 한 마디 "몇 층이세요?"를 건네는 손. 그런 순간들은 도시가 잊고 있던 다정함의 증거가 됩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다주는 손 하나가 그날 하루의 피로를 줄여줄 때도 있습니다. 누구는 ‘사회적 침묵’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비언어적 공존’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은 없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좁은 공간에서 서로 불편하지 않게 머무르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을.

 

엘리베이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함께 있음은 무엇인가?"라고. 혼자이면서도 같이 있는 법,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공존하는 감각, 그것은 도시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덕목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시 회복되어야 하는 감각이기도 하지요.
내릴 층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타인을 판단할 수 없다

엘리베이터는 방향성이 분명한 공간입니다. 누군가는 위로, 누군가는 아래로. 누군가는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도착한 층에서 내리고, 또 누군가는 잠깐 올라왔다가 금세 다시 내려갑니다. 사람마다 목적지가 다르고, 내리는 시점이 다릅니다.

도시의 삶도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빠르게 올라가고, 누군가는 멈춘 듯 머무릅니다. 누군가는 실수로 잘못 누른 버튼에 도착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단 한 층만 올라가는 데도 무거운 마음으로 타야 합니다. 삶의 층계는 늘 그렇게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당신이 가는 방향은 어디입니까?”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아주 작은 공간 안에서 누군가와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아주 작지만 의미 있는 공동체를 경험합니다. 엘리베이터라는 공간은, 도시가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주는 사적인 공공 영역이며, 동시에 낯선 이와 가장 가까이 서게 되는 철학적 실험장입니다.

 

엘리베이터는 목적지에 도착하면 문을 엽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세계로 다시 흩어지죠. 하지만 그 안에서 함께 서 있던 순간, 그 무언의 시간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하루가 조금은 다정해졌기를, 혹은 나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기를 바라며, 우리는 또다시 올라가고 내려갑니다.

도시의 모든 이동이 그러하듯,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만남 또한 짧지만 분명한 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