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덕. 대게와 해풍으로 유명한 이 바닷가 마을에는 오랜 세월 지역의 삶과 역사를 품어온 민속장이 있었습니다. 장날이 되면 골목골목에 좌판이 펼쳐지고, 아침 일찍 수확한 채소며 갓 지은 두부, 손으로 빚은 떡들이 속속 등장하던 곳. 그야말로 사람 냄새 가득한 공간이었습니다.
영덕의 민속장은 단순한 거래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이웃이 안부를 묻고, 상인과 단골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소소한 이야기들이 엮이는 작은 공동체의 중심이었습니다. 마을 어귀에 ‘오늘은 장날’이라는 현수막이 걸리면, 평소에는 고요하던 거리도 활기를 띠고 사람들의 걸음이 분주해졌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오늘은 장날’이라는 문구가 무색해졌습니다. 장이 열려도 좌판은 드물고, 손님은 띄엄띄엄하며, 장터 한복판에는 정적만이 맴돕니다. 누군가는 이제 장이 설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인터넷으로, 마트로, 택배로, 무엇이든 손쉽게 살 수 있는 시대니까요.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장이 사라진다는 것이 단지 상업 활동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은 한 지역의 삶이 모이고 흘러가는 공간이었습니다. 장이 멈춘다는 것은 곧 그 지역의 정체성과 공동체성이 약화되고, 기억의 장소가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장이 서지 않는 날’을 통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다시 살려야 할지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잊혀가는 오일장의 풍경
영덕의 민속장은 5일마다 한 번씩 열리던 전통 오일장이었습니다. 3일, 8일이 들어가는 날이면 사람들이 ‘오늘 장날이네’ 하며 바삐 움직였습니다. 아직 해가 뜨기 전, 트럭에 채소를 가득 실은 상인이 시장 어귀에 도착하고, 그 뒤를 따라 잡화, 생선, 옷가지까지 다양한 품목이 들어섰습니다. 천막 하나만 쳐 놓고 수십 년째 같은 자리를 지켜온 상인들도 많았고, 아버지의 좌판을 물려받아 나온 젊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멸치 아지매’는 유명인사였습니다. 싱싱한 멸치를 골라 양푼에 담고 “이거 한 소쿠리만 사가봐요, 볶아놓으면 밥도둑이라니까!” 하고 웃으며 손님을 맞이하던 모습이 장날의 명물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 손에 이끌려 오다가 엿장수 앞에서 발을 멈췄고, 어르신들은 떡집 앞 평상에 앉아 막걸리 한잔 나누며 근황을 나눴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그 풍경은 급속도로 희미해졌습니다.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소비가 일상이 되었고, 고령화로 인해 상인도, 손님도 줄었습니다. 이제는 장날이라 해도 과일 몇 상자와 채소 몇 단만이 좌판에 놓여 있을 뿐, 골목은 썰렁하고 상인들의 표정에도 예전 같은 활기가 없습니다.
그 무엇보다 뼈아픈 것은, 장을 통해 오갔던 ‘이야기’들이 끊긴 것입니다. 같은 가격의 물건을 사더라도, 장에서는 “이건 오늘 아침에 땄어”라는 말이 곁들여졌고, “잘 익은 김치 있으니까 다음에 가져올게”라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클릭 한 번이면 모든 것이 끝나는 세상입니다. 편리하지만, 너무 조용한 세상입니다.
장날의 사회적 의미
장을 단순한 시장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장은 지역 주민들의 삶을 지탱하는 네트워크였습니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는 장날이 유일한 외부와의 접점이었습니다. 정보와 소문이 오가고, 잊고 지냈던 친척과 친구를 다시 만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이웃 간의 관계가 희박해지는 오늘날, 장터는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영덕에서는 장터 근처에 항상 노점상이 있었습니다. 노인들은 직접 기른 쑥이나 고사리를 바구니에 담아 나와 팔았고, 손수 만든 된장이나 청국장을 내놓은 할머니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매출보다 ‘사람 만나는 재미’ 때문에 나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집에만 있으면 몸이 굳어서 못 살지” 하시던 할머니는 장날이면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시장으로 나왔습니다. 장은 그분들의 무대이자,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또한 장터는 교육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 엄마 손잡고 장에 따라 나가며 물건 고르는 법, 흥정하는 법, 사람 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어른들은 말없이도 아이에게 삶의 기술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이 장 대신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고, 계산대에서 말없이 카드를 긁습니다. 사람을 통해 배우던 것들이 이제는 시스템으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다시 살아나는 장의 가능성
다행히 최근에는 전통시장을 되살리려는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영덕군에서도 민속장 활성화를 위해 ‘청년 상인 유치’, ‘로컬 푸드 판매존’, ‘장날 문화행사’ 등을 기획하고 있으며, 일부 마을에서는 주민 스스로 장날을 다시 활성화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이야기 있는 장터’라는 프로젝트입니다.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의 삶을 인터뷰하고, 그 사연을 바탕으로 사진 전시나 공연을 여는 방식입니다. 단순히 물건을 파는 자리를 넘어서, ‘이야기’를 나누는 문화공간으로의 전환을 꾀하는 것입니다.
또한 SNS를 통한 ‘온라인 장터’도 조심스럽게 도입되고 있습니다. 할머니들의 직접 만든 김치나 장류를 주문받아 택배로 보내는 방식인데, 이는 전통의 맛을 현대적인 유통 구조와 결합한 예시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물리적인 장터와는 결이 다르지만, 지역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또 다른 가능성의 통로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의 복원’이 아니라 ‘전통의 재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장은 그저 예전처럼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가 바뀐 만큼, 장의 형태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정신—정(情), 나눔, 공동체성—만큼은 지금도 필요한 가치입니다.
장이 서지 않는 날, 우리가 잃는 것들
장이 서지 않는 날, 거리에는 고요함만이 맴돕니다. 좌판도, 외침도, 흥정도, 웃음소리도 없습니다. 그렇게 조용한 풍경 속에서 우리는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가?
장터는 단순한 소비의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정서, 관계, 역사, 문화가 깃든 장소였습니다. 영덕의 민속장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지 하나의 장이 문을 닫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억이, 하나의 방식이, 하나의 공동체가 스러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희망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장터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고, 전통의 가치를 다시 세우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청년과 노인, 지역과 외부가 함께 협력한다면, 장터는 단지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문화’가 될 수 있습니다.
영덕의 바람은 여전히 불고, 그 바람 속에는 대게 냄새만큼이나 진한 사람 사는 냄새가 담겨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그 바람을 따라 걷다가, 장터 골목 어귀에서 “한 소쿠리만 사가요!”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날, 장이 다시 서는 날, 우리는 비로소 지역의 뿌리를 되찾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