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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의 산촌 두부, 손맛이 끊긴 장터

by 조용한 성장 2025. 6. 8.

강원도 인제. 깊은 산골짜기와 맑은 계곡이 어우러진 이곳은 예부터 농사가 어려운 척박한 땅이었지만, 주민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지혜를 쌓아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인제 산촌 마을에서는 오랜 세월, 두부를 만들어 팔며 생계를 이어온 독특한 식문화가 있었습니다. 두부는 이곳에서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마을 장터의 중심이자 이웃 간 교류의 매개체였습니다.

 

인제의 산촌 두부는 시중의 공장형 두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손맛과 정성이 깃든 음식입니다. 두부 한 모를 만들기 위해 새벽부터 콩을 불리고, 맷돌에 갈고, 국을 끓이며, 고슬고슬한 두부를 틀에 눌러냈습니다. 사람들은 장날 아침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를 사기 위해 장터로 향했습니다. 그런 장면은 인제뿐 아니라 전국 각지 산촌에서 볼 수 있었던 평범하면서도 정겨운 풍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풍경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인제에서도 산촌 두부를 손수 만들어 장에 내다 파는 집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시간과 노동, 그리고 경제적 효율성 앞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단지 과거를 그리워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통 식문화가 단순한 ‘옛날 방식’이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 공동체의 정신, 삶의 방식이 집약된 문화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제의 산촌 두부는 바로 그런 가치를 담고 있는 대표적인 음식입니다. 이제 그 마지막 손맛을 기록하고, 다시 살아 숨 쉴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보려 합니다.

인제의 산촌 두부, 손맛이 끊긴 장터

손으로 짠 맛

산촌 두부는 한 모 한 모가 정성의 산물입니다. 전통 방식의 두부 만들기는 먼저 국산 콩을 깨끗이 씻고 하루 밤 이상 물에 불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인제에서는 특히 재래종 콩이나 강원도 특유의 토종 품종을 사용했습니다. 불린 콩은 손으로 일일이 확인해 껍질을 벗기고, 맷돌이나 손절구로 갈아낸 후, 물과 함께 끓여 콩비지를 걸러내고 진한 두유를 얻습니다. 이 두유에 간수를 넣고 응고시키는 과정은 온도와 타이밍이 결정적인데, 여기에 수십 년 손맛의 노하우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간수는 일반적으로 천일염에서 추출하거나, 콩 삶은 물에서 자연적으로 얻은 미네랄 성분을 활용했습니다. 두유에 간수를 넣으면 몽글몽글 두부가 엉기기 시작하고, 이를 틀에 넣고 눌러내면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두부가 완성됩니다. 맛은 고소하고 담백하면서, 은은한 콩의 단맛이 배어 있어 아무 양념 없이도 숟가락으로 푹 떠먹으면 속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줍니다.

 

산촌 두부는 간장이나 고추장 없이 먹어도 좋을 만큼 맛이 깊습니다. 그것은 단지 재료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손이 오랜 시간 만들어낸 미묘한 균형과 감각이 더해졌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콩, 똑같은 물이라도 만드는 사람의 손길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장터의 소리

인제의 장날, 산촌 두부는 장터의 중심이었습니다. 고소한 두부 냄새가 골목 끝까지 퍼지면, 사람들은 "아, 장날이구나" 하고 알아차렸습니다. 두부를 만드는 집은 대부분 여성 가장이거나 노부부였고, 이들은 새벽 4시부터 일어나 두부를 짜고 포장해 장터로 옮겼습니다. 비닐 포장 대신 나무 상자나 양은 냄비에 담긴 두부는 뚜껑을 열면 김이 피어올랐고, 마치 한 덩이의 삶을 꺼내는 듯한 감정을 자아냈습니다.

 

장터에서는 두부를 사면서 덤으로 비지를 얹어주기도 했습니다. 비지는 찌개나 전, 심지어는 돼지사료로도 쓰이며 버릴 것이 하나 없는 귀한 식재료였습니다. 장터 어귀에 앉아 두부전이나 순두부를 팔던 노점상들도 인제의 명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손수 만든 두부를 구워 간장에 찍어 팔며, 사람들과 정을 나눴습니다.

 

그러나 지금 인제의 장터에서는 이런 풍경을 보기 어렵습니다. 대신 대형마트나 프랜차이즈 식당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고, 대량 생산된 두부가 아무 감흥 없이 진열되어 있을 뿐입니다. 장터의 소리와 냄새, 손길, 그 모든 것은 어느새 희미한 기억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라지는 손맛

왜 산촌 두부는 사라졌을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시간과 노동의 문제입니다. 두부 만들기는 하루 종일이 걸리는 중노동입니다. 새벽부터 콩을 삶고, 간수의 온도를 맞추며, 눌러낸 두부를 식히고 옮기는 일련의 과정은 대부분 중노년 여성들의 손에 의해 유지되어 왔습니다. 이제 그분들의 연령이 높아지면서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두부를 만들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경제성입니다. 시장에서 전통 두부를 팔 수 있는 가격은 대개 3,000원~5,000원 선. 이에 반해 대형마트에서 파는 공장형 두부는 1,000원 이하도 가능합니다. 전통 방식으로 만든 두부가 품질과 영양 면에서 월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비자 입장에서 가격 차이는 쉽게 넘기기 어렵습니다. 수요가 줄어드니, 공급도 자연스레 줄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전통 식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입니다. 두부는 어느덧 너무 흔한 음식이 되어, 그 과정이나 문화적 의미를 돌아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젊은 세대는 두부가 마트에서 포장되어 나오는 음식이라 여기고, 그것이 농사와 손끝의 결과라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합니다. 교육과 체험이 단절되면서, 전통은 박물관이나 기록 속에만 존재하게 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다시 피워낼 수 있을까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인제의 몇몇 마을에서는 최근 산촌 두부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이 다시 조심스럽게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지역 공동체와 청년 창업인들이 협업하여 두부 문화의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으며, 두부를 활용한 로컬 푸드 카페, 전통요리 교실 등이 새롭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전통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현재의 삶에 맞게 번역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두부는 콩과 물, 그리고 시간으로 만들어지는 음식입니다. 이 단순한 구조 안에 인간의 손길, 계절의 흐름, 삶의 철학이 들어 있습니다. 인제의 산촌 두부가 사라진다는 것은 단지 한 음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이 품고 있던 공동체의 삶과 정서, 자연에 대한 태도, 노동에 대한 존중이 함께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전통은 왜 지켜야 하는가?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입니다. 산촌 두부는 ‘슬로푸드’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빠른 소비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느리고 손이 많이 가지만 그만큼 깊은 맛을 주는 전통 음식은 오히려 새로운 가치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인제의 산촌 두부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손맛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 고소한 냄새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배워보고, 공유하려 한다면, 두부는 다시 장터의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인제의 장터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손두부를 숟가락으로 떠먹는 풍경을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그 두부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낸 전통의 맛이자,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소중한 문화가 될 것입니다.